교황의 도시에 번진 김치전 냄새, 아비뇽은 지금 '코레'

 프랑스 파리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면 중세의 고고한 자태를 간직한 '교황의 도시' 아비뇽에 닿는다. 14세기 교황청이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이자 세계적인 와인 산지인 이곳은 매년 여름이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대로 변신한다. 그동안 한국인들에게 아비뇽은 남프랑스 여행 중 잠시 거쳐 가는 경유지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창립 8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한 아비뇽 연극제가 한국 공연 9편을 공식 초청하며 도시 곳곳에 한글 입간판과 한국 예술가들의 활기찬 발걸음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1947년 연출가 장 빌라르가 예술의 대중화를 선언하며 시작한 아비뇽 연극제는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 축제다. 올해 축제는 7월 4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되며, 특히 한국어를 '올해의 초청 언어'로 선정해 전 세계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에 이어 네 번째로 선정된 사례로, 유럽 중심의 예술 지형에서 한국 공연예술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식 초청작 47편 중 무려 9편이 한국 작품으로 채워지며 아비뇽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K-컬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번 축제의 열기는 기록적인 폭염조차 잠재우지 못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아비뇽 교황청 명예의 뜰과 도심 수도원 등에서 펼쳐진 한국 공연들은 현지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티아고 호드리게스 예술감독은 K-팝과 드라마에 가려져 있던 한국 동시대 공연예술의 저력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그는 프랑스 관객들이 기존의 자국 공연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동과 성찰의 기회를 한국 작품을 통해 발견하기를 바랐으며, 이러한 기획 의도는 전석 매진 행렬과 관객들의 기립 박수로 증명되었다.

 

무대 위 예술뿐만 아니라 한국의 맛과 멋도 아비뇽 골목길을 점령했다. 라벤더 향기가 가득하던 중세의 거리에는 노릇한 김치전 냄새가 번졌고,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이 한국 음식을 시식하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다. 구자하 연출의 '하리보 김치'와 같은 작품은 한국의 식문화를 예술적 서사와 결합해 현지인들의 오감을 자극했다. 프랑스어와 나란히 배치된 한글 안내판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관객들을 맞이하며 아비뇽이 단순히 프랑스의 도시가 아닌, 한국 예술과 교감하는 글로벌 플랫폼임을 실감케 했다.

 


축제에 참여한 한국 아티스트들은 이번 초청을 한국 예술계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으로 무대에 오른 소리꾼 이자람은 유럽 거장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아비뇽 무대에 동양인 예술가로서 당당히 서게 된 것에 깊은 감격을 표했다. 이는 단순히 한류의 인기에 편승한 결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 내실을 다져온 한국 공연예술의 독창성과 보편적인 예술적 가치가 세계 무대에서 정당하게 인정받은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비뇽 연극제의 80년 역사 속에 한국의 이름이 깊게 새겨진 이번 축제는 K-공연예술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대중문화 중심의 한류를 넘어 순수 예술 분야에서도 한국적 색채가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축제가 막바지로 향하는 지금, 아비뇽의 밤하늘 아래 울려 퍼지는 한국어 대사와 판소리의 가락은 유럽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예술적 잔상을 남기며 내년 축제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