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민통선 25분, 고대와 근대 잇는 시간여행
대중 매체가 각인시킨 궁예는 흔히 '관심법'과 '철퇴'로 상징되는 공포의 군주였다. 하지만 강원도 철원 민간인통제선 내부에 자리한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에서 만나는 그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이곳의 해설사들은 궁예가 신분 제약 없이 능력과 공로를 우선시했던 혁신적인 지도자였음을 강조하며, 불교 수행의 관점에서 그의 통치 철학을 재조명한다. 드라마 속 강렬한 이미지에 가려졌던 태봉국의 실체와 궁예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는 발길이 이어지는 이유다.역사공원의 중심에는 태봉국 철원도성을 정교하게 축소한 대형 미니어처가 자리 잡고 있다. 포정전과 동·서궁, 활기 넘치는 시전 거리까지 재현된 이 모형은 당시 수도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 도성 유적은 군사분계선 남북에 걸쳐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기에, 이 미니어처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태봉국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관람객들은 정교하게 배치된 건물들을 보며 천년 전 한반도의 중심을 꿈꿨던 궁예의 야망을 입체적으로 체감한다.

존경전에 모셔진 궁예왕의 영정은 방문객들에게 묘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익숙한 드라마 속 배우의 모습과 묘하게 닮은 영정은 마치 관람객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역사관과 용화정, 연못 등을 자유롭게 둘러보며 태봉국의 흔적을 쫓는 과정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잊힌 역사의 퍼즐을 맞추는 인문학적 탐정 놀이와 같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철원의 비옥한 토양이 길러낸 오대쌀과 파프리카 등 지역 특산물에 대한 풍성한 설명이 곁들여져 여행의 재미를 더한다.
여행의 시계는 고대를 지나 근대 철원의 번영으로 이어진다. 근대문화유적센터 일대에는 1930년대 인구 2만 명의 대도시였던 철원읍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당시 철원역은 경원선과 금강산 전기철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원형을 유지한 농산물검사소와 여름철 더위를 식혀주던 얼음창고의 잔해는 당시 철원 시민들의 역동적인 생활상을 묵묵히 증언한다. 화려했던 도시의 기억은 부서진 건물 파편 사이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하지만 근대의 번영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 앞에서 멈춰 섰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로 잘 알려진 녹슨 기관차의 잔해는 분단이 가져온 정지의 시간을 상징한다. 사람과 물자가 분주히 오가던 철길은 이제 잡초만이 무성한 채 끊겨 있다. 태봉열차를 타고 떠난 이 여행은 궁예의 고대 국가에서 시작해 근대의 번영을 거쳐 현재의 분단 상황에 도달하는 거대한 시간 여행의 완결판이다. 한 장의 탑승권에 한국사의 굵직한 굴곡이 모두 담겨 있는 셈이다.
태봉열차는 비록 혹서기 냉방 문제로 잠시 버스로 대체 운영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 가치와 감동은 변함이 없다. 민통선이라는 지리적 제약을 뚫고 고대와 근대의 흔적을 한 번에 만나는 경험은 철원만이 줄 수 있는 독보적인 선물이다. 멈춰 선 경원선의 철마처럼, 태봉열차 역시 분단의 벽을 넘어 더 넓은 역사의 장으로 달리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다. 내년 가을, 다시 힘차게 달릴 열차 위에서 마주할 철원의 또 다른 얼굴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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